전체 글51 [멕시코 86] 침묵이 빚은 상처와 유산 (침묵, 상처, 유산) 1986년 여름, 저는 스물한 살 신입사원이었습니다. 사무실 구석 브라운관 앞에서 선배들 틈에 끼어 멕시코 월드컵을 봤는데, 솔직히 축구 규칙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열기 속에서 처음으로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기억이 있었기에 México 86(2024)을 마주하는 순간, 단순한 스포츠 영화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아버지의 침묵은 어떻게 시작되었나México 86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배경으로, 한때 축구 선수를 꿈꿨던 아버지 에르네스토와 그 꿈을 이어가려는 아들 사이의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꿈을 접고 생계를 택했고, 그 이후 집 안에서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습니다. 아들 앞에서 축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일종의.. 2026. 6. 13. [마이클] 불완전한 신, 세상을 깨우다 (결함, 기적, 치유) 새벽 첫차를 몰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핸들을 잡고 있는 내가, 대기업 사원증을 달고 중국 출장 비행기를 탔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던 어느 날 밤, 오래된 DVD 케이스를 꺼냈습니다. 1996년 노라 애프론 감독의 영화 《마이클》이었습니다.결함 속에 숨겨진 신성의 역설영화 속 마이클(존 트라볼타)은 천사입니다. 하지만 이 천사는 담배를 물고, 파이를 탐하고, 여자를 밝힙니다. 날개는 달려 있지만 깃털은 지저분하고 몸에서는 냄새가 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게 천사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 5분쯤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게 위로였습니다.여기서 캐릭터 아이러니(character irony)란 인물이 기대되는 역할과 정반대의 속성을.. 2026. 6. 13. [마루타] 침묵의 공범 (복종, 균열, 양심) 1990년대 초반, 지지직거리는 VHS 테이프로 이 영화를 처음 봤습니다. 화면이 끊길 때마다 잠깐 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스물몇 살의 신입사원으로, 세상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는 곳이라 믿고 있었습니다.국가의 명령은 복종을 당연히 요구한다영화 《마루타》(1988)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 관동군 731부대가 중국 하얼빈 인근에서 자행한 생체실험을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재현한 작품입니다. 감독 무 떵페이는 극영화와 실제 기록 영상을 혼합하는 혼성 다큐드라마 형식을 택했는데, 여기서 혼성 다큐드라마란 극적 연출과 실제 자료 화면을 교차 편집해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연출 방식을 의미합니다.저를 오래도록 불편하게 만든 장면은 잔혹한 실험 장면 그 자.. 2026. 6. 13. [악마는 프라다를 입니다 2] 야망과 자아 사이 (균열, 선택, 회복) 1984년, 저는 대기업 입사 첫날 상사의 눈빛 하나에 온몸이 굳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내 색깔을 지워야 한다고 배웠던 그 시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제 젊은 날의 자화상 같은 영화였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버스 핸들을 잡는 지금, 속편 소식을 접하고 나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는 성공을 향해 달려가면서 얼마나 많은 '나'를 잃어버렸을까요?성공의 속도가 만들어낸 자아의 균열2006년 개봉한 1편에서 앤디(앤 해서웨이)는 패션 잡지 런웨이의 전설적인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 밑으로 들어가며 서서히 자신을 잃어갑니다. 속편은 그 이후의 앤디,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라는 새로운 권력 지형 앞에 선 미란다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줄거리만 .. 2026. 6. 13. [워킹맨]평범한 사람이란, 정의을 선택할때, 영웅 2007년 봄, 중국 선양 외곽 공단 지역 담벼락 앞에서 저는 문득 멈춰 섰습니다. 붉은 먼지가 내려앉은 그 골목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그 질문에 끝내 답을 못 한 채 18년이 흘렀고, 2025년 어느 날 밤 저는 극장에서 그 질문의 답을 만났습니다."평범한 사람"이란 과연 누구인가"평범한 사람"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정면으로 던집니다.워킹맨의 주인공 클린트(제이슨 스타뎀)는 공장 노동자입니다. 과거를 설명하지 않고,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며, 그냥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서 일합니다. 이 캐릭터가 강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너무나 평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얼굴에서 새벽 4시 반 차고지에서 버스.. 2026. 6. 13. [정보원] 국가 시스템, 개인, 소모 새벽 4시, 핸들을 잡기 전에 잠깐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다 보고 나서 한참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건드려진 게 있었는데, 그게 뭔지 정리가 안 됐습니다. 며칠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영화가 첩보물처럼 생겼지만 실은 다른 걸 묻고 있더라고요. 국가와 시스템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 질문이 제 안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를 건드렸던 겁니다."국가 시스템"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솔직히 물어봅시다. 국가 시스템이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2004년 봄, 청도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그 질문을 직접 체감했습니다. 회사는 "믿는다"라고 했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조건부였는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조직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 2026. 6. 13. 이전 1 2 3 4 ··· 9 다음